육아 체험 수기 _ 바나나
- 등록일 : 2022-11-02 00:36
- 카테고리 : 카테고리 없음
- 작성자 : 이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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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주였다. 아이의 기관지염으로 이주 째, 거의 날마다 병원에 출석 중인 날 중 하루였다. 그날도 갑자기 미열이 나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던 날이었다. 접수를 하는데 대기실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진료를 보려면 1시간정도 걸린다고 한다. 한숨이 푹푹 나왔다. 사람이 많은 좁은 대기실에서 날뛰는 3살 남자아이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일단 접수해 놓고 아이를 데리고 병원 밖으로 나섰다.
아이의 손을 잡고 간 곳은 병원 건물 바로 옆에 있는 카페였다. 이 카페는 올해 초에 아이가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에도 자주 왔던 곳이다. 아이의 거추장스러운 수액 폴대를 끌고 와도 친절하게 맞아 주셨던 기억이 나서 그 후로도 외래진료 때 오면 가끔 방문하는 곳이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아이도 모처럼 사준 음료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제야 한숨을 돌리는데 피곤이 몰려왔다. 얼음이 잔뜩 들어간 커피를 마시니 정신은 번쩍 드는데 피곤이 가시지 않았다.
지난 열흘이 넘는 동안 아이는 약은커녕 물 한 모금 먹으려 하지 않아서 애를 태웠다. 돌치레를 시작으로 아이에게 거의 매달 찾아오는 호흡기 질환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번 낯선 것이 아이의 병치레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나도 아이에게서 감기가 옮아 호되게 몸살을 앓았다. 남편이 있었더라면 덜 힘들었을까? 남편은 외항선을 타는 선장이다. 일 년에 두세 달 함께 있고 그 외에는 집에 오지 않는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도 쉽지 않지만, 아이가 아플 때는 어려움이 배가 된다.
커피를 마시는데 갑자기 사장님이 다가오더니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쥐어준다. 방금 따온 듯 샛노랗고 싱싱한 바나나 하나였다. 종일 입맛 없어 하던 아이가 바나나를 덥석 받았다. ‘감사합니다’ 인사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이와 다니다 보면 아이가 뛰거나 떠들 때마다 죄인이라도 된 것 마냥 부끄럽고 황망할 때가 많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친절을 받으니 왠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서러움까지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순식간에 제 몫의 음료와 바나나를 해치우고 무료해 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핸드폰을 쥐어주자 이제는 내 손이 심심해졌다. 마침 가방에 있는 노트를 꺼내 낙서를 끼적이다 문득 아이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카페 사장님에게 짧게 편지를 써보았다.
‘바나나 잘 먹었습니다. 친절 감사합니다. 번창하시길 빕니다.’
그런데 대충 뜯은 노트를 접으니 손바닥만 한, 볼품없는 쪽지가 되었다. 괜한 짓을 하는 것 같아 망설여졌지만 슬슬 진료시간도 다가와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주저하다 사장님이 자리를 비운 참에 카운터에 손편지를 놓고 후다닥 나왔다. 쓰레기인지 알고 버릴까봐 <커피에 반하다 사장님께>라고 적어두긴 했는데 보셨을지는 모르겠다. 보셨다면 잠깐이라도 빙긋 미소짓지 않으셨을까.
내 작은 손편지에 그날 아이가 받은 바나나, 아니 내가 받은 위로만큼의 값어치는 없었을 것이다. 바나나를 받을 때 인사를 했으니 그냥 나왔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래서 작은 손편지를 하나 써서 건네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필요했던 것은 큰 용기가 아니라 딱 손바닥만큼의 아주 작은 용기였다. 그것만으로도 그날은 저녁 내내 피곤이 가시고 힘이 났다.
내 작은 용기로 인생을 바꿀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의 오늘은 바꿀지도 모른다. 대단하지 않아도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로부터 며칠 뒤 다행히 아이는 다시 건강해져서 나의 외로운 육아도 한결 가벼워졌다. 바나나만큼의 친절과 손바닥만큼의 용기로 나는 오늘도 씩씩하게 아이를 키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