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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체험수기공모전]나와 다른 너의 세상, 엄마도 아빠도 처음인 세상

첫 만남부터 세상에 나오기까지

쑤큰, 쑤큰... 태아일 때 첫 심장소리. 생명이라는 축복의 감동, 그 감동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내가 자라 온 환경과 다른 현실이 피부에 느껴졌다. 코로나, 책도 영상물에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환경은 다른 시작을 알렸다.


며칠을 기다려 아내와 손잡고 방문한 병원에서, 심장소리를 듣고 입체영상을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아빠의 권리는 코로나 단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다. 아이에 대해 의사선생님에게 내가 의대생이라도 된 것처럼 공부해서 물어보고 답변을 듣고 싶었지만, 코로나로 쉽게 허용되지 않았다. 기술발달로 폰으로 볼 수 있었지만, 진료시간이란 찰나동안 아빠로써 들어가지 못하고 병원문이란 커다란 벽 앞에서 억겁의 시간을 보낸 것만 같았다. 부모들은 알 것이다. 태아가 작아도 걱정, 우량아라고 해도 걱정, 사랑에도 적당함이 없듯, 그래도 우량아라는 말에 남들보다 근심이 조금 적었던 것 같다. 


출산 당일 1분도 아내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출산대기중, 벽을 넘어오는 출산의 고통소리에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수시로 오는 고통 때문인지 항상, 아내의 밝게 웃는 얼굴만 봐왔던 나에게 아빠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경고라도 하듯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며 대신 아파하지 못하는 미안함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출산 전날 내가 별 의도 없이 ‘병원이 답답하다 나가고 싶다’라는 말에 아내는 자기는 더 힘든데 철없음에 속으로 온갖 욕을 다했단다. 그래도 눈물을 보고 조금 마음이 달래졌다고 한다.


남들은 짧다고 하는 4시간 만에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마스크에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는지도 모르고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보이지도 않겠지만, 마스크로 미소를 건네주지 못했던 건 코로나시대 아빠의 아쉬움으로 계속 남을 것 같다.


생후 6개월의 험난한 팬데믹 적응기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엄마와 아빠가 똑같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는 듯하다. 온라인상 유명한 소아과 전문의 말씀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사회에서 경제활동으로 인한 분리의 시간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라고 했다. 요즘 날이 갈수록 출근길 발이 떨어지지 않지만, 당시에는 아내가 육아휴직을 길게 하지 못하고 복귀 시점이 다가오자 전문가의 말을 태연히 읊었다. 냉정해보일수도 있지만 아내는 수긍을 해주고, 냉철히 판단하는 모습이 나랑 사는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하며 마음 씀씀이를 보여주었다. 


어린이집 최연소 아이, 아이에게 원장선생님 담임선생님이라는 2명의 엄마가 더 생긴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아이의 엄마를 찾는다는 심정으로 정말 많은 어린이집을 찾아다닌 것 같다. 결정은 생각보다 빨리하게 되었다. 처음 보내는 날, 너무 어려서 외부에 맡기면 질병에 취약해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어린이집은 절대 탓하지 말자’라는 이 다짐이 돌이켜보면 코로나육아를 이겨낸 힘이었던 것 같다.


3번, 아기가 코로나에 3번이나 걸렸다. 처음 한번은 아이 엄마와 함께, 그리고 2번을 더 걸렸다. 고열에 병원은 받아주지도 않고, 온 몸을 닦고 부채질해가며 며칠을 꼬박 샜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안 좋은 사례들은 우리 부부를 패닉에 빠지게 만들었다. 새벽이면 증상이 더 심해져 아이가 흘린 땀만큼 우리도 눈물을 훔치며 간호했다. 언론에서 말하는 것을 그대로 다 겪었다. 변이에 따라 백신을 맞는 성인과 달리 미접종자는 변이에 또 쉽게 감염된다고 했다. 아이는 그대로 2번째 감염이 되었다. 아기용 백신이 있다면 1번으로 맞춰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뉴스에서는 부작용을 보도하지만 병원도 가지 못하고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속에 있기만 하다면 바로 접종시키고 싶었다. 연일 감염자가 넘쳐나는 상황에 회사도 인원이 없어 부재가 자유롭지 않았지만 몇 개 남지 않은 연차를 다 써가며 3번째 감염을 극복했을 때는 ‘장기 휴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많이 반복해서 호흡기 치료도 스스로 하는 아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코로나만 아니라면 어린이집이 있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 생각은 너무 초보 아빠적인 생각이었다. ‘감기’ 그리고 ‘수족구’ 등원을 자제해야하고, 아예 안 되는 법정질병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코로나로 연차는 다 소진되었다. 경제활동에 죄책감 없어야 한다는 전문의 선생님 말을 아내에게 전했던 내가 스스로 어리석어보였다. 온갖 방법을 고민하다 문득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봤던 지하철 광고가 떠올랐다. ‘입원아동돌봄지원’ 사무실에서 이런 것도 있다라며 얘기를 해줬는데 정작 내가 쓸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코로나 1차 감염 때 물어보고 어렵다고해서 포기했는데 절박한 심정으로 급한 맘에 메신저로, 전화로, 사이트로 신청을 했다. 몇 시간 뒤, 전화로 접수를 하며 신상을 확인하더니 ‘여러 군데로 신청하셨네요?’라는 말에 안도의 웃음이 나왔다. 아이가 태어나면 온 동네 어른이 키운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날의 다른 의미로 함께 키운다는 말이 새롭게 다가오는 듯하다.


아이는 어느새 3살을 향해가고 있다. 모르는 사람은 4~5살로 볼 정도로(옷은 이미 4살 것을 입고 있다) 건강해 보인다. 잔병치레하면 장수한다는 얘기처럼 지나고보니 큰 병이라는 것도 잔병이란 생각이 들고 건강하게 커 나갈 것 같다. 이 모든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


<가족사진 - 광주 챔피언스필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