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체험수기] 32년째 육아 중
- 등록일 : 2022-11-13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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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광자
- 조회수 : 1274
<32년째 육아 중>
푸른 잎이 사방을 아우르는 화창한 봄날의 연속이었던 5월 7일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지인들과 2박 3일간의 제주 여행을 마치고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는데, 지인 한 명이 길을 잃어버려서 찾으러 다니질 않나, 매표를 잘못해서 배를 탑승하지 못할 위기에 처하질 않나. 참 머리가 아픈 날이었다.
어둑어둑해져서야 배에서 내렸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사위였다.
“어머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전화 드렸어요. 다정이가 지금 전남대병원에 입원해있어요. 그제 새벽에 양수가 터져버렸어요. 어머님 아버님 여행 중이시라 다정이가 말하지 말라고 했었어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우리 딸은 임신 33주차로 아직 더 아기를 품고 있어야 하는데, 양수가 터졌다니! 분명 여행 중에 연락했을 때 잘 있다며 웃어보였던 딸이었다. 우리 딸이 부모가 자신으로 인한 걱정 없이 즐겁게 여행하길 바라는 마음에 소식을 전달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기가 33주라 너무 어려서 자궁수축억제제로 분만 진행을 막고, 아기가 추후 세상에 나왔을 때 자발 호흡할 수 있도록 폐성숙주사를 맞고 있으며, 최소 34주까지 버틴 후 분만할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한숨이 절로 나오고, 걱정이 밀려왔다. 내가 다정이를 품었을 땐, 38주쯤에 발로 빨래를 밟다가 병원 가서 바로 낳았었는데……. 딸도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순산할 줄 알았었는데…….
마음 여린 우리 딸은 분명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딸에게 전화하고 싶었지만 나도 딸의 목소리를 들으면 슬플 것 같아서 일부러 전화하지 않고, 문자만 남겼다.
‘다 잘 될거야. 엄마 아빠가 너와 호빵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
전남대병원 고위험 산모 집중치료실에 입원해있는 딸에게 면회를 가고 싶어도 코로나 시국이라 갈 수 없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딸의 상황을 그저 전화로만 듣고 있어야 했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이 답답했다.
34주째가 되어 자궁수축억제제를 떼고 자연분만을 위한 진통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매일 딸에게 전화해서 진통이 있는지를 물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오히려 진통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는 소식에 또 걱정이 되었다. 양수 파열로 감염의 위험과 양수량 부족 위험이 있는데 터진지 2주가 다 되어도 손주 녀석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35주차가 되어서, 딸은 유도 분만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손주가 언제 나오나 매일매일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데, 시작한지 38시간이 되어서도 소식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 동안 내색 한 번 하지 않던 남편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당신이 다정이와 하진이를 낳을 때만 해도 순풍 순풍 잘 낳기에, 아기 낳는 것이 그 땐 어려운 줄 몰랐어. 그런데 다정이를 보니, 그 옛날 나 없이 혼자 가서 아기를 낳았던 당신이 홀로 힘들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고마워.”
다정이는 결국 자연 분만 실패, 유도 분만 실패로 응급 제왕절개 수술에 들어갔고, 5월 22일 오후 2시가 넘어서 귀여운 나의 손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귀엽고도 귀여운 나의 손자 장도영은 엄마 뱃속에서 모든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1달 일찍 세상에 나왔지만, 그 누구보다 우렁찬 울음소리를 가진 몸이 튼튼하고 건강한 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35주차인데 몸무게가 3.37kg이라는데, 다정이가 38주차에 3.3kg로 태어났다.
나는 아기를 낳느라 고생한 딸의 산후조리를 기꺼이 도와주기로 했다. 한없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가 친정으로부터 받지 못해 한이 맺혔던 산후조리를 아낌없이 도와줄 것이라 다짐하고서 말이다.
드디어 딸과 손자 도영이가 집에 오는 날, 손자를 처음 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 딸이 낳은 아기면 얼마나 귀엽고 예쁠까. 사진으로는 크게 보였던 손자를 실물로 보니 부서질 것처럼 작디작아서 몹시도 설렜더랬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산후조리 첫날부터 딸과 언쟁이 붙었다.
“엄마, 실내 적정 온도는 23~24도, 습도는 40~60도래. 지금 실내가 너무 더워. 28도~29도잖아. 에어컨 무풍으로 틀어야 돼. 도영이 태열 오르면 감당 안 된단 말이야.”
“딸아. 너 지금 출산하고 온지 이제 2주 됐어. 그렇게 춥게 있으면 산후풍 와서 나중에 고생해. 더워도 참아야지. 산모가 몸을 따뜻하게 해야지, 무슨 에어컨이니. 도영이 태열이고 뭐고 네 몸에 지금은 더 중요해!”
“엄마, 도영이 때문만이 아니라, 산모도 덥게 있으면 상처 덧나고 안 좋아. 오히려 스트레스 받는다니까? 옛날이나 꽁꽁 싸매고 있었지, 지금은 안 그래. 나 긴 팔에 긴 바지, 양말까지 신고 있잖아. 더워 죽겠어. 그리고 임신출산 대백과사전에서도 23~24도로 있으랬어!”
도저히 끝낼 수 없는 논쟁이었다. 나중에 여기 아프네, 저기 아프네 말하기만 해봐라! 속으로는 어깃장을 놨지만 나중에 산후풍에 걸리지 말아야 하는데……. 딸이 걱정만 되었다.
딸은 엄마가 되었고 나는 할머니가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딸의 엄마였다. 32년째 딸을 걱정하며 육아 중인 나는 아마 죽어서야 육아의 끝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 나는 엄마가 나를 쉽게 낳았다 길래 정말 쉽게 낳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세상에 순산이란 없었어. 엄마도 날 낳을 때 목숨 걸고 낳은 거였어. 이제야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나를 낳고 키웠는지 알겠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그래도 조금은 철이 든 32살 우리 딸을 보고 나니 육아의 끝이 천천히 오길 바랄 뿐이었다.
“엄마, 도영이가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 1번은 너희 아빠, 2번은 도영이, 3번은 너네야.”
또한 귀여운 미소를 잔뜩 날려주며 나에게 방긋방긋 웃고 있는 도영이를 품어 보니, 아직 육아를 할 힘이 남아 있음을 느꼈다.
